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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술만 따지자면 공기 조화 기술의 역사는 깊다. 이미 고대 수메르나 고대 중국에서 이미 공기의 대류현상을 활용하여 열기를 식히려는 공학적 시도가 진행되었다. 한국사에서도 삼국시대 신라에서 제작되었던 석빙고가 대표적인 공간냉각의 사례다. 이러한 시설은 대부분 특별한 필요에 의하여 외부의 열을 차단하고 물품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함이었지 사람을 위한 시설은 아니었다.
근대적인 냉각기계는 18세기경 등장하였다. 1758년 벤자민 프랭클린과 그의 동료이자 케임브리지 대학 화학과 교수이던 존 해들리가 에테르를 뿌린 수은 온도계를 통해 온도를 실온에서 영하 7도까지 냉각시켰고, 몇 년 뒤인 1820년에 마이클 패러데이가 압축-냉각된 암모니아의 기화를 통해 공기 냉각의 원리를 발견했다. 이 발견 자체는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다. 기술 자체는 혁신적이라서 제법 쓰였으나 하필 사용되는 물질이 암모니아라서 악취가 필연적으로 동반된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20년 뒤인 1840년, 인류가 최초로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고 후술할 최초의 전기식 에어컨에도 큰 영향을 줬다.
1850년에는 당대 말라리아의 원인으로 여겨졌던 ‘미아즈마(miasma)’, 곧 장기(瘴氣) 또는 독기(毒氣)로 번역되는 나쁜 기운[6]을 없앨 방법을 궁리하던 존 고리(John Gorrie) 박사가 마침내 이 미아즈마를 없앨 방법으로서 새 발명품을 고안했다. 고리 박사가 발명한 말라리아 퇴치 장치의 기능은 ‘말라리아 환자의 병동에 찬 공기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이 발명은 당대 지식의 부족으로 원인을 모기가 아닌 공기로 잘못 잡았으므로 이미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들을 낫게 해 주지는 못했지만, 이 장치 덕분에 사람들이 더운 날에도 창문을 열지 않게 되어서 모기가 집 안에 더 적게 들어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말라리아의 발생을 감소시켰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다.
최초의 전기식 에어컨은 1902년 7월경, 코넬 대학교 전기공학 석사 출신의 엔지니어로 당시 제철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윌리스 캐리어에 의해 개발되었다. 당시 뉴욕 항 인근 인쇄소에는 바닷바람으로 인한 높은 습도 때문에 여름에는 종이가 습기를 먹어 쉽게 축 늘어졌고 반대의 경우는 장력이 너무 팽팽해져 균일한 인쇄 품질을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문제가 있었다. 캐리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장비를 고안했다. 최초의 에어컨은 의외로 사람이 아니라 인쇄기를 위한 보조 설비의 일종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기술적인 원리나 효과 등은 현재와 동일하다. 당시 히터는 뜨거운 열 코일 사이로 공기를 불어넣어 덥히는 개념이었는데, 이를 거꾸로 적용해 전기식 열 코일 대신 냉매가 코일형 관 속에서 움직이며 열을 빼앗아가고 코일 사이를 흐르는 공기가 차가워져 튀어나오는 방식이었다.
캐리어는 이후 이 기술을 기반으로 1915년에 캐리어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생산과 판매에 돌입했다. 당시의 정식 명칭은 The Carrier Air Conditioning Company of America. 이 기업은 100년이 조금 넘어간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한국에도 진출하여 자주 보이는 상표명이다.
이후 지속적인 개발을 통해 인쇄 보조 설비만이 아닌 여러 용도로 쓰일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곧 여름철에 쾌적한 실내 유지가 가능하다라는, 이전엔 생각도 못했을 사고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밀폐된 공간에 모인다는 특성상 여름 영화관은 비수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힐 정도였지만 에어컨의 존재 하나만으로 이전까지 성수기 자리를 차지하던 겨울을 밀어내고 여름이 영화관의 성수기인 계절로 안착했다. 더불어 여름만이 아닌, 봄이나 가을에도 특히 더운 날씨에 더욱 사람들이 별 고민 없이 영화관을 찾아오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를 시작으로 식당, 마트, 호텔 등 유동인구가 많은 시설에서 에어컨 설치 붐이 일었으며 의외로 이 ‘설치 붐’에 참여한 곳이 ‘회사’였다. 이유는 다름아닌 회사원들의 야근 선호도와 능률이 올랐다라는 심플한 이유. 실제로 현재도 에어컨의 전기요금은 살떨리는 수준이나 이보다 더 전엔 평범한 가정이 감당하기엔 훨씬 부담될 정도였고 어차피 야근을 해야할 정도로 일에 쫓겨있다면 덥고 습한 집에서 휴식하기보다는 차라리 시원한 곳에서 기후적인 불쾌감 없이 편하게 일하는 게 낫다는 기조가 깔려있던 것도 컸다.
에어컨은 건축 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여름에 건물 안의 온도를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법은 환기뿐이었기에, 모든 방은 창문이 달려있고 천장이 높았다(특히 천장 선풍기의 설치에는 아주 높은 천장이 필수적이었다). 모든 문 위에는 트랜섬(transom)이라는 작은 창문이 달려있어 여름에는 이를 열어둬 환기를 도왔다. 그러나 에어컨이 등장한 후 환기는 냉방으로 바뀌었고, 큰 창문과 높은 천장은 냉방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들은 이전보다 천장이 낮고 창문이 상대적으로 작아졌다. 과거 건축물에 비하면 비좁고 갑갑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일부 건물들은 아예 열 수 없는 통짜 창문을 설치해 냉방과 전망을 동시에 추구하기도 했는데, 이런 통짜 창문은 2중 유리로 단열 능력은 높았지만 한여름에 강렬한 태양광이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기에 냉방에 불리하다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3.1. 한국의 에어컨[편집]
3.1.1. 도입기[편집]
에어컨이 한반도에 도입된 시기는 생각보다 꽤 빠르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에어컨이 한반도에 보급되어 있었다. 일례로 1937년에 약초영화극장(스카라극장)에서 냉방장치를 설치했다는 신문 광고를 낸 기록이 전해지고 # 경성의 몇몇 백화점 등에도 에어컨을 설치해서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한때 대한민국에서 에어컨이 최초로 설치된 장소가 경주시의 석굴암이라는 얘기가 나돈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3년 일본 제국의 복원 기술자들이 석굴암을 해체, 재조립화는 과정에서 엄밀한 사전 조사 없이 당시에는 신형 건축자재로 각광받았던 시멘트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결로 현상이 발생하였고, 해방 후인 1960년대에 다시 복원 공사를 진행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의 주도 하에 에어컨을 설치한 사례이다. 이 에어컨은 범양상선(현 팬오션) 및 범양냉방(현 귀뚜라미범양냉방)이 일본에서 수입하여 1966년 8월 설치한 것으로, “당시까지는 청와대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장치를 설치했다”는 식으로 알려졌다. 세간에서는 “석굴암이 한국 최초의 에어컨 설치 사례다”라고 오랫동안 회자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집단적 오기억(false memory)으로 실제로는 석굴암의 복원 공사 이전에도 대한민국에는 에어컨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일제시대에도 곳곳에서 활용되던 에어컨이 1950년대 1960년대에 없었을리가 있는가. 1950년대 당시 태평로1가에 있던 국회의사당에서 에어컨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1956년에는 국회에 설치된 에어컨의 암모니아 탱크가 폭발하는 사고가 보도된 적도 있다. # 국가 중요 시설뿐만 아니라 하술할 대한극장의 광고에도 1958년 개관 당시부터 “‘에어콘듸숀’의 냉난방 장치 가 완비되었다”고 쓰여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장충체육관의 경우에도 1963년 1월에 찍힌 사진에서 에어컨이 설치된 것이 확인된다. 이외에도 석굴암에 에어컨이 설치되기 이전인 1960년대 초중반 상류층 가정에서는 가정용 에어컨을 사용했으며, 마포아파트 입주 초기에 촬영된 사진에도 창문형 가정용 에어컨을 설치한 세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을지로에 있었던 미국문화원에도 이미 1965년 7월에도 창문형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다. #
이런 집단오기억 내지 착각이 생긴 것은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서 경주를 소개하면서 석굴암 복원과 에어컨 설치에 관한 에피소드를 크게 다루고, 심지어 TV 프로그램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정보전달이 잘못된 탓이 크고, 더 나아가 “한국의 과거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이다”라는 과도한 선입견이 개입된 탓도 있어 보인다.
3.1.2. 보급기[편집]
1960년대 말에 이르러 한국 최초의 에어컨 브랜드인 경원세기(센츄리) 에어컨이 나타났으며, 이어 1970년대에는 금성사(지금의 LG전자) 등 한국 가전 회사들이 한국산 에어컨을 개발해 출시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는 일본 다이킨사와 제휴해서 주요 기술을 전수받던 수준이었다.
한국 최초의 에어컨은 금성사가 제너럴 일렉트릭과 기술제휴를 맺고 1968년 4월 출시한 가정용 에어컨 ‘GA-111’이며, 1971년부터는 중앙집중식 에어컨[8]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1974년 5월부터 에어컨을 만들었고, 대우전자는 전신인 대한전선 시절인 1968년부터 일본 도시바와 기술제휴로 에어컨을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1985년에는 캐리어와 손을 잡고 합작사 대우캐리어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
그러나 한국산 에어컨이 출시되었다고는 해도 1970년대에는 에어컨 자체의 가격이 너무나 비쌌는데, 지금으로 치면 가히 웬만한 고급 외제차나 다를 바 없는 포지션이었다. 상술한 GA-111도 출시 당시 기준으로 16만 2,700원[9]으로 당시 월평균급여(약 8,500원)[10]과 비교하면 가히 노동자의 1년 7개월치 봉급 수준이었다![11] 당시 금성사 흑백TV 가격이 68,000~75,000원[12] 했을 때에 이 가격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서민 가정에는 대개 에어컨이 없었으며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났다. 그런데 당시 선풍기도 상당한 고가품이어서[13] 따라서 이때까지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부채나 물로 더위를 식혀 여름을 나는 경우가 많았고, 집에 선풍기를 한 대만 둘 수 있더라도 꽤나 만족해야 할 상황이었다.[14]
1972년 6월 기준 대한도시바가 생산한 가정용 에어컨은 181,500원[15], 사무실용 에어컨은 231,000원[16]이었다. # 1972년 6월 기준 근로자 평균 임금이 22,650원[17]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각각 근로자의 8개월/10개월치 봉급과 완전히 동급인 셈이었다! 당시 금성사 20인치 흑백TV 가격이 89,910원[18], 5인 가족 최저생계비가 14,888원[19][20]이었던 시절에 이 가격이었다.
1975년 1월 18일 기준 금성사 GA-113 에어컨[21] 가격이 27만 원 남짓이었다. 19인치 TV가 99,000원 하던 시절에 이 가격이었다는 것이다. #[22] 당시 노동자 평균 급여는 48,700원(1976년 기준)[23]이었으니 금성사 에어컨은 당시 평균적인 노동자의 반년치 봉급과 맞먹는 수준의 가격이었다는 것이다. 상술한 1975년 1월 18일 경향신문 기사에서 모든 가전제품 중에서도 가장 비싸다고 언급된 것이 바로 에어컨이었다.[24] 심지어 비슷한 시기 미국산 에어컨은 40~50만 원이었다. #
당시 가정집은 에어컨 같은 전력 소모량이 큰 전기제품을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지어지지 않았기에, 에어컨을 한 대만 가동해도 두꺼비집의 퓨즈가 나가거나 차단기가 떨어져 집이 정전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당시 개인주택이나 공동주택(아파트)은 에어컨 설치를 고려하지 않은 설계라 에어컨을 달려면 벽에 큰 구멍을 뚫거나 창문을 개조해야 했다. 지금 에어컨은 실내기와 실외기 사이를 냉매 파이프로 연결해 주기만 하면 되지만, 당시 가정용 에어컨은 일체형이라 거대한 에어컨 본체를[25] 벽이나 창문으로 관통해 정면은 실내, 후면은 실외에 위치하도록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의 에어컨을 오늘날엔 창문형 에어컨이라 부르지만, 당시엔 창문뿐 아니라 건물 외벽(!)에 구멍을 내고 설치하기도 했다.[26] 당시 스탠드형 에어컨은 크기와 용량이 크고 업소용이었으며, 벽걸이형 에어컨은 국산 제품이 1970년대 후반 부터 판매되었다.
이렇게 벽체/창호 공사까지 해가며 에어컨을 설치했어도 전기료 때문에 마음대로 틀지도 못하는 것이 당시의 에어컨이었으며, 한여름에 더워서 에어컨을 틀자고 자녀가 졸라대면 “우리가 이병철네 집인 줄 아니?”라고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지금도 에어컨은 전기 먹는 하마지만 당시 에어컨은 효율이 나빠 전력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당시 가정에서 전력 사용을 측정하는 전기 계량기(전력량계)는 요즘같은 전자식이 아니라 유도형 전력량계로 전력 사용을 바퀴의 회전으로 나타냈는데, 평소에는 10분을 쳐다보고 있어도 한 바퀴 도는 것을 보기가 힘든 바퀴가 에어컨을 켜면 수초만에 한 바퀴 도는 무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1968년에는 가뭄 때문에 수력 발전이 제대로 안 되자 김정렴 상공부장관이 정부, 국영기업, 은행, 접객업소(관광호텔 제외)에서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이 있었는데, 발전량이 적으면 사용이 금지되어야 했을 정도로 에어컨의 전력 소모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27] 1972년 기준 에어컨을 하루 6시간씩 사용하면 한 달 전기료가 3,500원[28]이 나갔는데, 비슷한 기간&시간 동안 선풍기/냉장고를 쓰면 전기료가 120원/210원[29]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살인적인 전기료였던 셈이다. #
그럼에도 당시 중산층을 중심으로 에어컨의 사용은 점차 늘어났고, 여름철에 일반 가정의 전력 소모가 급증한데다 오일 쇼크까지 겹쳐 전력 공급이 어려워지자 1973년에는 전기료 누진세가 도입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전기료 누진세 덕분에 에어컨은 서민은커녕 중산층도 어찌저찌 구매하더라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 되었고, 1980년대까지도 부유층 집안만이 여유롭게 사용하던 사치품이었다. 관광호라는 그야말로 금수저도 범접하지 못할 수준[30]의 기차에나 겨우 에어컨이 달려 나오던 시절이었다.
당시(1970년대~1980년대 중반)에는 일반 가정뿐 아니라 공공 시설이나 업장에도 에어컨은 호사스런 물건이었다.[31] 1970년 7월에 서울 어린이회관[33]에 에어컨을 설치하자, 이 찬바람 나오는 기계를 구경하고 피서를 하겠다고 전국에서 수십만 인파가 몰려왔을 정도다.[34] 1970년대 중반까지는 서울 도심의 최고급 백화점에조차 에어컨이 없었으며 천장에 매달린 여러 대의 대형 선풍기로 실내 온도를 관리했다.[35] 소형 업장에서는 스탠드식 선풍기나 벽걸이 선풍기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에어컨을 마련한 업소들은 은행과 극장 정도였다. 특히 극장은 창문을 열 수 없어 여름엔 에어컨이 필수품이었기에, 대한민국에서 대형 에어컨이 가장 먼저 널리 보급된 업종이 극장업이었다. 특히 당시 극장들은 신문에 영화 광고를 낼 때 반드시 자기네 극장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음을 자랑하며(주로 “냉방 완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름철에는 시원한 극장에서 에어컨으로 피서하며 영화를 관람할 것을 권유하곤 했다. 당시 업장 안에 에어컨을 설치한 가게들은 흔히 에어컨의 송풍구에 짧은 리본들을 매달아 놓고,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에 리본이 휘날리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 가게는 이렇게 에어컨이 켜져 있다’고 보여주곤 했다.